집주인 신분증만 믿었다간 전세금 잃어

지배층은 친청파·친일파·친러파 등으로 나누어져 청·일·러시아의 앞잡이 내지는 대변자로 둔갑했다.

한편 청은 거문도 사건의 해결에 중재자를 자처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더욱 강화했다.절해고도에 주둔한 영국군의 약한 고리를 잘 활용해 영국군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선진문물을 접할 기회로 삼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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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정탁] 거문은 ‘클 거(巨)에 ‘글월 문(文)인데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이에 남진 정책을 과감히 펼쳤는데 영국에게는 자신의 식민지를 위협하는 중대한 도전이었다.인천 팔미도 등대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등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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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후인 186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차지해 부동항을 확보했다.이에 따라 1860년부터 40년간에 걸쳐 조선·일본·중국 연안 등지에서 부동항을 물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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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정이 점령군 영국군과 교섭하기 위해 거문도에 갔을 때 청의 북양함대 사령관 띵루창(丁汝昌)도 동행했다.

제정 러시아가 동북아 진출을 위해 거문도에 눈독을 들이자 영국이 이를 눈치채고 미리 점거해 동양의 지브롤터가 되어서다.크림전쟁은 나이팅게일의 신화로 유명하지만.

함대도 10척 규모로 커지자 조그만 섬이 갑자기 북적거렸다.민비가 살해된 후 신변에 불안을 느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하니 어처구니가 없다.

19세기 말 국제정치의 압축파일 러시아 남진정책에 영국 견제구 국토 앗기고도 조선은 속수무책 지배층 분열에 열강의 싸움터로 청일전쟁·러일전쟁 잇따라 터져 개혁기회 놓치며 백성만 피눈물 이베리아 반도와 한반도남쪽에서 바라본 거문도.블라디보스토크보다 효용 가치가 높은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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